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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인사이드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킨 멕시코 여성화가 '프리다 칼로'

by 호야봉봉 2022. 9. 10.

프리다칼로-부서진 기둥 작품

소아마비, 교통사고 등 고통으로 점철된 프리다 칼로의 삶 

1907년 태어난 프리다 칼로는 머리가 영특한 소녀였지만, 1913년 여섯살에 척수성 소아마비 라는 병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고생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그런 프리다 칼로가 걱정되어 격투, 수영, 권투 등 여러가지 운동을 다 하게 뒷바라지 해주었습니다. 아버지의 그러한 노력 덕에 프리다 칼로는 다시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또다시 시련이 찾아 왔습니다. 1925년 18세에 프리다 칼로가 탄 버스와 전차가 부딪쳐 쇠막대가 프리다 칼로의 몸을 뚫고 지나갔습니다. 이 사고를 계기로 프리다 칼로의 온 몸에 있는 뼈들이 산산조각 났습니다. 11개로 조각난 다리, 왼쪽 어깨와 오른 발은 으깨져서 탈골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평생을 걸쳐 32번의 수술, 지지대와 진통제 없이는 견디기 힘든 삶을 살아나갔습니다. 몇 년 동안 병상에 누워있던 그녀는 병마를 이겨내기 위해 처음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끊임없이 자가 훈련을 하며 걸을 수 있게 됩니다. 그때부터 조금씩 사회활동을 시작합니다. 사회주의 정당에 들어가 활동하기도 하는데, 활동하며 디에고 리베라라는 남자를 만납니다. 디에고 리베라라는 남자는 당시 가장 존경받는 벽화 화가였습니다. 디에고는 사회주의적인 색채가 짙은 벽화들을 선보였습니다. 당시 멕시코는 자본주의 흐름에 반감을 갖고 있었고, 디에고는 멕시코인들의 민족정신을 대변하는 벽화들을 많이 남겼습니다.  

 

프리다칼로는 리베라에게 자신의 그림을 보여주며, 어떤지 예술가로서의 자질이 있는지 판단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녀의 그림을 평가해주러 오가다 결국 프리다칼로와 사랑에 빠집니다. 그녀의 솔직함과 당돌한 배짱에 반해 그녀와 연인이 되었습니다. 1929년 21세 연상의 화가와 결혼합니다.

 

그와 결혼한 후 화풍에도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서구 문명의 정복저인 이상에 맞서 멕시코의 전통을 그리던 멕시카니즘 화풍도 자신의 그림 속에 녹이기 시작합니다. 멕시카니즘은 멕시코인들의 민족 수호의지가 담겨있기도 했지만 반대로 현대미술 흐름 속에서 멕시코의 전통을 녹여내려는 시도이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에 그려진 프리다의 그림들은 현대적이지면서도 전통적인 느낌을 두루 풍겨내기도 합니다.

순탄치 않았던 결혼 생활 

프리다칼로와 디에고의 결혼 생활은 그리 순탄치 않았습니다. 그둘은 결혼 후에도 예술활동과 사회활동을 같이 했는데 디에고의 여성 편력이 문제였습니다. 디에고는 결혼 생활 중에도 끊임없이 바람을 피웠습니다. 디에고는 프리다의 여동생과 바람이 나 딴 살림을 차리기까지 이르릅니다. 뿐만 아니라 프리다의 건강 상황도 좋지 않았습니다. 3번의 임신을 하는데, 결국 모두 유산하고 맙니다. 이는 프리다에게 큰 충격을 줍니다. 

 

이 시기 그려진 프리다의 작품은 신체적 고통과 디에고에 대한 애증, 갖지 못한 아이들을 상징하는 기호들이 가득합니다. 절망의 시기 프리다에게 있어서 작품 활동만이 유일한 위로였습니다. 하지만 프리다 칼로는 암울한 현실을 외면하기보다 직시합니다. 

자화상으로 승화한 치열한 정면응시 

충격에 휩싸인 프리다칼로는 디에고와 헤어진 후, 그가 좋아하던 긴 머리카락과 토속의상을 벗어던집니다. 비로소 유명인의 아내에서 자신만의 색을 가진 화가로 다시 서게 됩니다. 1939년 루브르에 전시된 멕시코 최초의 화가이며 대부분 자신의 자화상을 그렸습니다. 모두 정면을 응시한 프리다칼로의 얼굴을 볼 수 있습니다. 프리다칼로의 자화상은 초기작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몰아치는 삶의 불행 속에서 도망치기보다 똑바로 응시하고 마주하는 모습을 그려넣고자 했습니다. 이것은 그녀의 의지이기도 했습니다. 프리다 칼로가 자화상을 많이 그린 까닭은 대부분 혼자 보낸 시간이 길었고, 이로인해 그녀가 잘 그릴 수 있는 소재도 자기 자신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일생 동안 자신의 자화상을 많이 그렸던 프리다의 마지막 작품은 아이러니하게도 정물화였습니다. 수박 그림으로 'Viva la vida' 로 우리말로 인생이여 만세라는 뜻입니다. 프리다의 인생은 고통스러웠지만 프리다는 이를 슬픔으로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작품 너머 프리다가 느꼈던 감정들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1954년 47세 프리다는 마지막 유언으로 '이 여행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 이라고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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